우리의역사 동학운동과 6월민주화운동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리의역사 동학운동과 6월민주화운동

반응형

5천년의 유구한 우리의역사가 모두 자랑스러운것은 아닐것이다. 부단한 외세의 침입이 있었고 우리민족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서로 작은힘이라도 보태 꺼져가는 국운에 일조하고자 하는 노력이 늘 있어왔다.
개화가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동학 서학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먼저 권력을 잡기위해 상대편을 죽이거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는데 세월을 보낸적도 있었다.
오늘의 글 주제가 동학과 6월 항쟁이다. 이두사건이 불의에 항거한 것에 대해서는 어딘가 닮아있다.
개항이 되고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나라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이당시 시대상을 좀봐야되는데 민씨정권이 잡고있던 시절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근대화문물 수용비용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었다. 또한 지배층 즉 관리들의 횡령과 수탈이 심화되고 있었고 가장큰것이 일제의 경제적수탈로 국내가내 수공업에 큰타격을주고 있었다. 이에 농민지식인과 농민들이 반봉건 반외세를 슬로건으로 하는 민족적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동학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은 아니다. 동학이 시작된것은 1960년 경주사람 최제우가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경상도지방을 근거지로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정부는 최제우를 나라를 어지럽히고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교리는 평등사상 사회변혁사상을 중심으로 당시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파했다. 최제우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신원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다음으로 교주에 오르신분이 최시형이다. 이때부터 동학이 경주중심에서 벗어나 삼남지방 서울등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외세 반일본을 구호로 경제적항거 정신적 항거 였다면 진행되면서 정치적 반국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농학농민군을 창설하여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는가 하면
당시 부패하고 무능했던 조선정부에 폐정개혁을 주장하기도했다. 이개혁의 주내용은 봉건적 지배층을 엄벌하고 신분제개혁하고 농민생활안정이나 반외세 반봉건과 같은 것이었다. 동학운동이 우리역사에 긍정적인면을 많이 줬다고 보는데 먼저 갑오개혁에서 이들의주장이 어느정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이후 의병운동에 가담해서 항일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다시 현대사로 와서 동학의 데자뷰 사건이라 함은 6월 항쟁이다. 지금 정치권력의 주요 세력중 하나인 586세력들이 중심이 되어서 그당시 독재정권인 전두환정권어 항거한운동이다. 본인도 그세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그위현장에 있었던사람으로 이한열 박종철 죽음을 뉴스로 접하고 분통했던 시절을 보내왔다.
독재정권만 없어지면 민주화되리라는 순수한 열정 그때는 그것이 통했던 시절이다.
이즈음 동학과 6월항쟁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내뇌리를 스치는 것은 우연일까? 당시 정의를 외치면서 죽어간 선인들의 굳센 의기를 절대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개인주이 패거리주의 여기서 패거리주의는 집단주의의 부정적인 용어라 해도 될것이다.
자기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고 집단 따돌림시킨다.
다시 조선시대 당쟁을 보는것 같아 서글프기 까지하다.
우리는 동학운동과 6월항쟁이라는 좋은 본보기가 있다. 주변생각을받아들여 비판해도 늦지않다. 자기생각이 다맞는것도 아니고 특정집단의 생각이 반드시 정의라할수 없다. 2020년을살고 있는 우리들은 삶에 대처하는 지혜를 선인들에게서 배워야 할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