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역사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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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역사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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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우리역사에 어찌 순탄한 길만 있었겠는가? 혹독한 외세의 침입에 나라가 없어질뻔도 하고 그외세에 무릎도 꿇고 또 항거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어져 왔다.
외세의 침략에는 무기를 앞세운 무력침공도 있었지만 또한 경제적 예속을인한 생활문화의 종속도 여러차례 있어 왔다.
그것을 우리선인들은지켜 왔으며 거기에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늘 주제로 할려는것은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것이다 . 지금도 그정신을 기리기위해서 대구시에서는 시내한 중심에 국채보상공원을 만들어 그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오늘 주제로 하는 국채보상운동 은 대구에서 처음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지식인 상공인들이 내가 직접실천 할수 있는 실천행동 즉 금연이라든가 금주를 통해 우리의 힘으로 외세의 부채를 갚아 나감으로써 경제적자립과 국권수호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론이나 관념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모금활동에 나섬으로서 외세에 항거 하였다.
우선 국채보상운동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배경을
알아보면 190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한 선조치로 경제적 예속을 하기위해 많은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경제적예속의 일환으로 시설개선을 시켜 우리나라에 많은 차관을 빌려 쓰게 했다. 그당시 어려웠던 우리 정부는 시설개선을 목적으로 많은 돈을 빌려쓰게 되고 갚을 능력이 없었던 우리정부는 우리나라의 통치권력을 하나씩 하나씩 내주게 되었다.
이처럼 차관도입으로 이당시 통치권력이었던 대한제국은 총 1300만원 이라는 엄청난 외채를 지게되었으며 이는 갚을수도 없는 돈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의로운 선인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이 양기탁 서상돈 이라는 분이다. 이분은 대구에서 활약하던 분으로 국민의힘으로 일본으로 부터 빌려쓴 외채를 상환하자고 모금운동을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이운동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았으며 추후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갔다.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등 언론기관이 이제 그운동을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일어 났지만 1900년대의 시대상황 즉 일본의 동조단체인 일진회와 통김부의 교묘한 탄압으로 실패하게 된다. 구체적 예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양기탁을 모금액 횡령죄로 구속을 시키는가 하면 이운동에 가담되었던 각종 언론기관을 탄압하였다.

비록 이국채보상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일반국민에게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으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근대사공간에도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격기도 하고 또 극복해 왔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꼽으라면 imf외환시기라 하겠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기 부도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대량 실업을 겪게 되었다. 우리는 슬기로운 민족이다. 어렵다고 주저앉은적이 언제라도 있엏는가! 우리들은 또한번의 기적을 경험하게된다. 그것이 금모으기 운동이다. 애들 돌반지 장농속에 숨겨둔 금붙이는 그때 다 나왔다고 할정도로 가열차게일어 났다. 그런 수고로 imf외환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몇안되는 국가로 세계에서 부러위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과 금모으기운동 어딘가 비슷한점이 많다.
나라가 어러울수룩 똘똘 뭉치는 국민성이닮았고 국가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애국정신이 닮아있다.
우리 선인들의 저력 국채보상운동을 되새기며 오늘은 국채보상공원에서 우리 선인들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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